카테고리 없음

유교와 한국의 유교 사상 및 한국의 제사

라이프데이 2023. 10. 3. 03:11
반응형

한국 유교는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수용되고 발전한 유교를 말하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신앙 체계로 발전했습니다.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지만, 삼국 시대에 한자 도입과 함께 자연스럽게 전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기원은 중국 당(唐) 나라의 영향을 받은 학문인 국학(國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교와 한국의 유교 사상

유교(儒敎)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년) 말기에 성문화된 공자의 가르침을 연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에서 유래한 독특한 종교 및 철학 체계입니다. 유교는 창시자인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불립니다. 이 철학은 또한 인간의 올바른 행동을 강조합니다.

유교의 핵심 개념 또는 특징적인 원칙은 덕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는 길을 찾는 덕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본질적으로 유교에는 학문과 실천이 모두 통합되어 있으며, 지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천상적인 문제도 이상적으로 다스리면서 자기 수양을 목표로 합니다.

권선징악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유학자들의 역사 서술에서도 권선징악이 자주 등장하나 실제 역사에서 권선징악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유학자들이 있으나 귀족 세력이 멀쩡하여 역사 서술에 참여할 수 있었던 지역들은 권선징악적 역사와는 거리가 멀며 보다 실증적입니다.

 

유교와 종교

유교가 종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유교는 현대적으로 해석할 때 유교나 유교 사상과 같은 의미에서 종교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대신 인(仁)을 이념의 핵심으로 삼아 사회와 세계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윤리와 정치의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유교에 대한 세 가지 주요 주장은 첫째, 유교는 정의된 스승, 교리, 교파,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종교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라는 점, 둘째,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상과 종교를 압도하는 특정 종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오늘날 서구적 맥락이나 분류 체계 내에서 적용될 때 유교는 종교적이지 않다는 점 등 세 가지입니다,

 

유교의 전래

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불교와 도교 등 동아시아의 다른 주요 사상과 유교가 통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세 가지 전통의 요소를 모두 수용했습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입니다, 유교는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동아시아의 사상의 흐름은 크게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인데, 한국은 이러한 세 가지 사상적 요소를 모두 흡수·구비하여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과는 지역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고대로부터 유교사상이 한국에 들어와 민족정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교는 중국을 발상지로 하고 그것이 여러 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국사상에 대하여는 문헌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한자와 더불어 전래되었다고 추정되며 삼국시대 때, 당(唐) 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습니다.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유교 사상의 공헌과 결함

공헌

유교가 한국의 국가발전과 문화향상에 이바지한 공헌으로서는 흔히 다음 몇 가지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유교는 삼국 시대 부족 연맹 국가가 봉건 군주제로 정치 체제를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를 거치면서 군주제와 관료제를 강화하고 중앙집권화하는 한편, 인재 채용에 능력 위주의 제도를 도입하여 유교적 가치를 장려했습니다. 이는 국가와 국민 모두의 유교화를 촉진하여 전형적인 유교 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상적 측면에서 유교는 개인의 윤리적 기준과 도덕의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오륜으로 알려진 원칙은 가정생활, 사회적 상호 작용 및 국가 정체성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충성, 효도, 겸손, 의로움과 같은 개념은 사회 전반에 널리 수용되어 가족 간의 유대와 국가 통합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둥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절을 존중하고 사회적 위계를 중시하는 것이 강조되면서 평범함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명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외국인들로부터 동양의 예의범절을 잘 보여준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의 송학(宋學), 정주학(程朱學)은 부패와 불의에 맞서 싸우다 사화 또는 죽음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정의와 진리를 향한 그들의 확고한 신념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굴의 정신은 결국 사림을 통해 서원을 설립하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서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해 왔지만, 원래의 목적은 의를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성현이나 개인을 기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사화와 권력 투쟁은 이론적 유교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선비들은 숲 속으로 은거하며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심신-정신의 연결과 개성의 수호를 둘러싼 논쟁은 중국의 성리학을 넘어 일본의 퇴계학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유학은 국내 정세 변화에 따라 자기 성찰을 시작하면서 철학적, 형이상학적 이론 연구에서 현실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로 관심을 돌려 실학이라는 새로운 유학 경향을 낳게 됩니다. 유학은 원래 내면과 외면의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수기(修己)와 덕(德)은 내적인 측면이고, 통치자와 이익은 외적인 측면입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성리학은 '수기'와 '정덕'의 이론과 실천에 중점을 두었고, 그 이후의 실학은 '치인'과 '이용후생'(구체적인 섭리와 실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의 이론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역사, 지리, 문화 체계에 대한 검토와 비판이 이루어지면서 유학은 더욱 한국화, 토착화되었고, 청나라를 통한 서양 문물의 수입과 함께 '북학'과 '서학'에 대한 관심도 확대되었습니다.

 

결함

그러나 동시에 유교는 한국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결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예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번문욕례(繁文縟禮)"로 알려진 관혼상제 의식에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형식에 대한 집착은 진정성을 잃고 체면을 살리기 위해 서두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농·공·상'이라 하여 '사(士)'의 위계질서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평민을 무시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양반' 계급과 같은 사회 계층 간 분열이 생겨났습니다. 이 특권층은 학문을 구실로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 사이에 적대감을 조장했습니다.

 

도교가 도덕적 인격 함양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덕이 가장 중요하고 재물은 부차적"이라는 믿음이 "사대부" 계급 사이에 굳어졌습니다. 그 결과 물질 생산 산업과 이윤 중심의 상공업 등을 천시하고, 이런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농업 이외의 상공업은 번성할 수 없었고 과학과 기술도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유교 경전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의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생겨났습니다. 유교 경전을 존중함에 따라 그것도 습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한문(漢文) 학습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 자기의 문자(한글) 사용을 등한히 하여 민족적 문학·예술의 발전을 지연시켰고, 경전의 교훈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고수하려는 행세 위주의 '양반 유학자'들이 증가되어 감에 따라 시(時)와 세(勢)를 가리지 못하고 시중(時中)을 맞추지 못하는 보수·완고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유교의 특유한 성격처럼 되었습니다.

 

유교에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내포한 본질면이 있고 그것을 응용함에 있어서 시대와 사회에 따라 생기는 말단적인 폐단도 있습니다.

 

유교의 기본 사상

인(仁)의 사상

인(仁)은 유교사상의 기본 원리입니다. 공자는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다(仁者人也)"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사람'은 한 개인을 의미하며, '인'은 그 개인이 지닌 덕목이나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 인의 길은 금지된 것과는 구별되며 인간의 본성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인간이 따라야 할 고귀한 길입니다. 또한 주자(朱子)는 인(仁)이란 "사람이 사람 되는 까닭의 원리(人之所以爲人之理)"라고 말하였습니다. 유교에서는 사랑이 인(仁)의 구체적인 예로 사용됩니다. 제자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인은 원칙을 나타내며 사랑은 그 실천을 구체화합니다.

효(孝)의 사상

효는 유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공자가 강조한 이래 동양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효의 개념은 조상 숭배와 천지 숭배의 관행에서 비롯됩니다. 효는 부모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부모를 섬기는 것을 수반합니다. 이러한 의무감은 직계 부모뿐만 아니라 부모로 여겨지는 먼 조상,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 더 큰 힘인 하늘과 땅으로까지 확장됩니다.

 

효는 영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효의 실천은 가족 단위에서 시작되며,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미덕의 근본적인 측면으로 여겨지는 사랑을 경험합니다. 충은 유교 철학의 또 다른 핵심 요소로, 효는 개인 가정을 넘어 사랑을 바탕으로 한 사회를 만드는 데까지 확장됩니다.

 

효는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로 불리는 영향력 있는 인물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통치자가 효의 모범을 보이고 백성들이 이를 따르면서 동시에 통치자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할 때 사회는 화목해집니다.

따라서 효는 가족 내에서 윤리적 행동을 장려하는 역할을 넘어 공동체 또는 국가 전체에서 개인 간의 화합을 촉진하는 필수적인 사회 규범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禮)의 사상

예(禮)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데, 종교의례. 윤리. 제도 등의 각 관행을 말합니다.

예(禮)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예(禮)는 실천함이다. 신(神)을 섬기어 복이 이르게 하는 바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禮)는 중국 고대의 관행인 촌락공동체나 가족공동체 및 왕이나 제후의 궁정에서 행해졌던 것을 제도화한 것입니다.

 

 

한국의 제사

한국의 제사(韓國의 祭祀)는 크게 천지신명을 비롯한 자연물에 드리는 제사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로 나뉩니다.

오늘날에는 흔히 제사는 조상 제사만을 가리키는 때가 많습니다. 현대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를 믿거나 이민을 가서 제사를 아예 지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천 문화(祭天 文化)

제천 문화는 단군조선을 시작으로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신라의 신궁제사(神宮祭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나라가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중국에 조공하고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제천 문화는 끊깁니다. 이후 고종이 천제단인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제천 문화를 부활한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유교식 제사는 고려 말부터 도입되었습니다. 그 후 조선 초에 사대부를 중심으로 중국의 ‘주자가례’가 수용되면서 점차 보급되었습니다.

국가의례로서의 제사

한국에서는 국가와 국민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 의식이 행해져 왔습니다. 이러한 의식에는 제천 의식과 조상 숭배가 포함됩니다. /

봉제사 (奉祭祀)

봉제사는 조상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며 조상을 기리는 전통으로, 봉사(奉祀)라고도 합니다.

조선 후기 이후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봉제사(奉祭祀)에 있어 남녀 분리가 널리 퍼졌습니다. 이로 인해 남성 가족 구성원 중심의 의례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들과 며느리는 제례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고, 장남(종손)과 맏며느리(종부)를 중심으로 제례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맏며느리가 행사한 권한은 오늘날에 비해 상당히 강했습니다.

오늘날의 봉제사

현대에 이르러서는 1969년 제정된 정부 지침으로 제례 관행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허례허식을 피하고 검소한 제례를 갖추도록 권장해 온 이후,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로 국한되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핵가족화, 결혼관의 변화, 종교적 소신 등으로 제사 의식이 퇴색하는 추세입니다. 개신교인이나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명절 때마다 늘어나는 인천공항 이용객 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해가 지날수록 조상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사회적 현상입니다.

오늘날 가족 제사 관습은 먼 친척이나 조상보다는 직계 가족에 초점을 맞춘 검소한 의식을 장려하는 정부 규정에 따라 간소화되었습니다.

 

실제로 2017년에는 제사폐지를 청원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청원자는 “명절이면 대다수 여성들은 친정에 먼저 가지 못한 채 며칠 수고로운 일을 마친 후에야 겨우 친정에 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명절 증후군 등 심한 부작용도 일고 있다”며 향후 제사나 명절 모습은 변할지 모르겠지만, 국가가 먼저 나서 종교도 아닌 우리 것도 아닌 중국 잔재를 없애야 한다고 본다 “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우리 고유의 것도 아닌 중국의 제사를 답습해 마치 우리 고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생활에 (제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정작 중국에선 제사가 없어지는 추세라고 한다”며 우리나라가 속국도 아닌데 왜 중국문화를 보존해야 하느냐 “고 지적했습니다.

반응형